중세후기와 종교개혁 시기 – 유스토 곤잘레스

중세후기와 종교개혁 시기 – 유스토 곤잘레스

중세후기

교황권 몰락의 징후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때(1303)부터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까지

성장하는 부르주아는 여러 나라의 군주제의 협력자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봉건체제는 끝나고 근대 국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가주의 그 자체는 곧 교회 일치에 장애가 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기간 동안에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을 벌였고, 대부분의 다른 유럽 국가들도 또한 그 전쟁에 관여했다. 이 시대는 또한 “페스트 전염병”의 때였따. 이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상당히 감소되었으며 그리하여 인구 통계학과 경제학상에 대변동이 일어났다.

교황권의 몰락은 분명히 그리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첫째 프랑스의 보호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교황청은 로마에서 프랑스 접경 지역에 있는 아비뇽(1309-1377)으로 이동되었다. 그 후 “서방교회의 대분열”(1378-1423)이 왔으며, 이 때 두 명의 교황(때로는 세 명의 교황)이 동시에 나타나서 서로 성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고 아울러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공의회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이 운동의 바램은 전체 교회의 공의회가 진정한 교황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공의회 운동으로 분열은 끝나고, 모든 사람이 단 한 사람의 교황에 대해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공의회 자체가 분열되었고, 그 결과 이제 교황은 하나이지만 공의회는 둘이 되었다. 곧 이어 교황들은 르네상스 정신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교황들은 교회의 영적인 생활에 관한 것보다는 로마의 재건과 아름다운 궁전의 건축과 다른 이탈리아 세력들과 전쟁을 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교황권처럼 스콜라 신학 – 즉, 대학에서 행한 신학 – 또한 위기를 맞이했다. 더욱 더 애매한 특성과 전문화한 어휘에 근거한 스콜라 철학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생활과의 관계가 더욱 멀어졌으며, 오직 신학자들에게만 관심있는 주제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몇 가지 개혁운동들이 있었다. 존 위클리프와 존 후스와 지랄라모 사보나롤라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어떤 다른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이 새로운 학문의 결과로서 나타날 것을 바랬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기보다는 신비주의에서 그들의 안식처를 찾았다. 이 신비주의를 통해 그들은 영적인 생활을 계발하였고, 부패하여 개혁이 불가능한 교회와는 상관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였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더욱 쇠약해졌으며 마침내 터키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정복과 종교개혁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에서 16세기 말(1600)까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이 이 시기에 발생했다. 그 하나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이다.

비록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정복을 교회사에서는 거의 취급하고 있지 않지만, 매우 유명한 사건들이다. 그러나 불과 백년밖에 안되는 이 기간에 유럽은 세계의 많은 지역,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그 결과 자칭 기독교인들이 전례없이 수적으로 많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서반구의 정복은 현재 교회사의 중요한 부분이며, 교회는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루터가 그의 유명한 95개조를 발표한 1517년을 보통 종교개혁을 시작한 연대로 잡는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전에 오랫동안 개혁운동이 있어 왔지만, 개혁운동을 피하라 수 없는 계기로 만든 것은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을 반대한 사람들 모두가 루터와 그의 신학에 동조를 한 것은 아니었다. 곧이어 또 다른 운동이 스위스에서 나타났다. 처음에는 쯔빙글리의 지도하에, 그 다음에는 칼빈의 지도하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보다 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적들은 그들에게 “재세례파” – 다시 세례받는 사람들이라는 뜻 – 라는 경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이 종교개혁파에서 메노파(Mennonites)와 몇몇의 다른 그룹들이 파생하였다. 영국에서는 다른 종류의 개혁이 나타났다. 이것은 개신교신학(특별히 칼빈신학)을 따르면서 교회 정치와 예배에 관한 고대의 전통들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영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이며, 여기서 오늘날의 “성공회”와 “감동파”(Episcopal)라는 이름의 교회들이 파생되었다.

부분적으로는 종교개혁의 결과로써,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내부의 역동성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도 또한 이른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으로 불리는 새로운 움직임을 겪었지만, 이 움직임은 종교개혁에 대한 단순한 반응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많은 갈등과 전쟁을 경험하면서도 개신교는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에서는 오랜 종교전쟁을 치른 후 일시적으로 타협을 한 결과, 왕은 가톨릭교도였지만 개신교 신자들을 인정하였다.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와 다른 나라들에서는 개신교를 무력으로 억압하였다.

 

–  유스토 L. 곤잘레스, 간추린 교회사,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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